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국을 마음 깊이 사랑한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프랭클 윌리엄 스코필드’, 한국 이름 ‘석호필’은 독립운동 당시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립니다.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계획을 아는 것은 외국인 중 그가 유일했는데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이던 그는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에 알리고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 배포하고 국내외 영어신문에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기고문을 게재하는 등 외국인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을 해냈습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대구형무소를 찾아 수감자들의 고문 흔적을 확인한 뒤 조선 총독과 정무 총감 등을 만나 항의하기도 한 용기를 지닌 의인이었습니다.

일본의 눈엣가시였던 그는 결국 1920년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는데요. 그 후로도 기고와 서한 등으로 일제를 규탄하고 조선 광복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958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임용돼 고아들을 돌보고 민주화와 반부패 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문화훈장과 건국훈장을 받은 그는 그토록 사랑한 한국에서 눈을 담아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또한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로버트 그리어슨’은 함경북도에서 애국 계몽운동과 의료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입니다.
3.1운동 당시 집과 병원을 애국지사들의 본부로 내줬으며, 일본 경찰이 발포해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때, 주저하지 않고 길에서 부상자를 옮기고 치료한 의인인데요. 마찬가지로 1968년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미국 출신의 ‘앨버트 테일러’는 뉴스 통신사 UPI의 전신이 UPA의 서울 특파원이었는데요. 그는 기미독립선언문 사본을 입수해 전 세계에 타전한 인물입니다.
제암리 학살사건도 취재해 외신 기사로 보도했고, 스코필드, 언더우드 등과 함께 조선 총독을 찾아가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했는데요. 테일러 또한 자신의 유해를 한국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는 외국인 독립운동가들 덕분에 3.1운동을 기점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점차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미국 주요 언론에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문구가 있는 기사만 해도 총 62건에 달한다고 하는데요. 신문 1면에 보도한 기사도 19건이나 됐습니다. 이처럼 파란 눈의 독립투사들의 업적은 살펴볼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는 흔히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동포’라는 단어로 민족성을 규정지을 때가 많은데요. 인종도, 문화도, 국적도 같은 것이 하나 없는 이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조선의 독립을 외치고 지원 할 수 있었는지 그 마을을 다 헤아리기 어려운데요.
그런 그들의 이유를 바로 3.1운동 당시 한국에 머물렀던 한 외국인 선교사의 글을 실은 외신 기사 한 토막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와치맨 앤 서드런’의 1919년 3월 22일 자 1면에 실린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이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한국에서 막 돌아온 미국인 선교사는 그곳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평화적 저항운동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독립선언서는 한국이 모든 국제권리에 따라 자주국이며 4000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일어나 독립을 위해 평화 시위를 하라고 촉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쓰지 말라고 요청한다.

이 선언서는 위엄이 있고 힘차며, 선언서에 묘사된 한국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모는 공분을 일으킨다”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저항운동, 온 국민이 목숨 걸고 독립을 위해 싸우는 대단한 나라, 높은 품격과 놀라운 저력을 지닌 국민이 있는 나라. 바로 이것이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흠뻑 빠진 이유가 아닐까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