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한가운데 인구 45%가 한국 혈통인 섬… 절대 잊으면 안 되는 한국 후손들

지난 2014년 7월 30일 미국, 한국, 일본의 언론은 ‘93세 미국인 시어도어 반커크씨가 사망했다’ 는 속보를 띄웁니다.

이 남성은 세 나라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태평양 전쟁의 승리를, 한국에게는 광복을, 일본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하늘의 요새’라고 불리던 미군의 ‘에놀라 게이(B-29 슈퍼 포트리스)에는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실립니다.

굉음과 함께 남평양의 한 비행장을 떠난 ‘에놀라 게이’는 항법사 ‘반커크’의 안내를 받아 아시아를 향해 6시간을 날아가더니 갑자기 짐칸을 열어 4,080kg 짜리 ‘작은 녀석’을 투하합니다.

원자폭탄 ‘리틀 보이’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된 이 녀석이 바로 인류 최초의 우라늄 원자폭탄 ‘리틀 보이’입니다. 리틀 보이를 투하한 당시 일본 방위대는 “미국 폭격기 2대를 발견했다”면서 경계경보를 올렸지만 곧바로 취소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워낙에 미군 폭격기가 등장하는 일이 빈번해 공습사이렌 소리에 익숙한 상태였고 만약 실제로 폭격할 것이었다면 10대가 넘는 폭격기가 떠야 하는데 단 2대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통상적인 정찰임무로 보고 경계경보를 취소한 겁니다.

그런데 이 2대의 폭격기가 히로시마의 미래를 바꿔 버렸습니다. 경계경보를 취소한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낙하 장소로부터 10km는 잿더미가 됐고 히로시마 전체 인구의 1/3이 즉사했습니다.

한미일 언론이 동시에 사방 속보를 띄운 주인공 ’시어도어 반커크’는 이 에놀라 게이에 탑승한 10명의 미국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습니다.

“더 큰 인명 손실을 막는 대의를 위해 7만명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는 각오로 리틀보이를 투하한 미군은 일본의 항복을 기대했지만 일본은 백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3일 뒤 또 한 대의 폭격기 ‘박스카’가 남태평양 상공을 날아갑니다. 이번에 출격한 ‘박스카’에는 ‘뚱보’라고 이름 붙여진 플루토늄 원자 폭탄이 실렸습니다.

‘리틀보이’ 보다 덩치가 훨씬 컸던 ‘뚱보’의 무게는 무려 4,670 kg. 이 뚱보는 원래 군수공장이 모여 있는 ‘고쿠라’에 투하될 예정이었으나 짙은 먹구름으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습니다.

투하 연료와 남태평양까지 귀환할 때 필요한 연료를 계산해보니 고쿠라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결국 뚱보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8만 명의 인명 피해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원자폭탄 투하로 즉사한 희생자의 상당수가 한국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일제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강제로 징용해 군수공장으로 끌고 갔던 조선인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놀라 게이’와 ‘박스카’가 이룩한 곳이 사이판에서 10분거리 위치한 ‘티니안섬’인데 이 섬이 바로 ‘제2의 한국’이라고 불러야 할 곳입니다. 왜냐하면 이 티니안섬 원주민의 절반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왜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요?

지난 1997년 중앙일보에 이순남 기자는 한남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의 상원의원 ‘데이비드 싱’을 만납니다. 티니아 섬의 원주민 ‘차모로족’인 자신의 할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티니안 섬에 살았던 한국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의 성 ‘싱’은 자신의 할아버지 성 ’신’ 에서 따왔는데 신씨 성이 티니안에서 자연스럽게 ‘싱’ 으로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티니안에는 싱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50명 정도 되는데 모두 한국인의 피를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서 “그들은 전부 경찰국장, 노동국장 등 정부 요직 등 상류층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료의원 에스티븐 킹 역시 한국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에스티븐 킹의 성 ‘킹’은 한국의 성씨 ’김’이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남태평양의 작은 섬 티니안에서 상류층을 형성한 한국인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외에도 ‘최씨’ 성이 변한 ‘치오’ 등을 가진 티니안 원주민 ‘차모로족’은 꽤 많은데 이들 전부가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입니다.

어쩌다 이들은 남태평양까지 강제 징용됐던 것일까요? 한국인이 여행지로 가장 사랑하는 북 마리아나 제도의 수도 ’사이판’과 ‘티니안’은 전부 한국인이 강제로 끌려가 고된 노동에 고통받았던 역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이판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승전국 회의를 통해 일본이 지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년 내내 온화한 기후를 보이는 사이판은 사탕수수 재배에 최적지였고 이에 일본의 ‘남양흥발’ 이라는 기업이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1930년대 후반 그 노동자들을 대부분 오키나와와 조선에서 데려간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2010년에 드러났는데,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1930년대 후반 사이판 등의 남양군도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대부분 지옥같은 고통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일제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5,000명이 넘는 조선인을 남양군도로 강제로 징용했고 대부분의 조선인을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 등에 투입해 혹사했습니다.

그러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후 그들은 총알받이로 내몰려 폭격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대부분 숨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사이판과 티니안이 자리한 북 마리아나 제도는 미군에게도 일본군에게도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1944년 6월 15일 발발한 사이판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도 가장 치열했습니다. 사이판은 ‘슈퍼 포트리스’라고 불리던 B-29 폭격기가 일본까지 직접 날아갈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 모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였는데요.

30일이 넘는 기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가 발생합니다. 약 20만명의 미일 병사 간 치열한 전투로 섬 전체를 피로 물들이 끝에 미군이 승리하기는 했으나 미군도 3,000명이 전사하고 10,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은 2만여명이 사망하고 생존한 군인 및 민간들은 일본 정부의 ‘옥쇄’ 명령에 따라 전부 해안절벽에서 투신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군 사령관 ‘사이토’ 중장은 할복으로 충성심을 보였고, 1,000여명의 일본 민간인 전원은 ‘만세 절벽’으로 올라가 차례로 투신했는데 절벽에 올라선 부인들은 아이들을 안고 투신하는 등 집단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재 사이판의 ‘Suicide Cliff’가 바로 일본군 최초의 전원 옥쇄가 있었던 ‘만세 절벽’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사이판 전투에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희생도 컸습니다.

처음 조선총독부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일할 수 있고 10년 이상 된 장기이주자에게는 농지도 준다”는 약속으로 민간인을 남양군도로 끌고 가서는 조선인들을 강제노역 시키다 전투에서는 대부분을 총알받이로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사이판에서 10분 떨어진 티니안섬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본군은 강제로 끌고 간 조선인들을 이용해 비행장을 건설하는 등 이 섬을 전쟁 준비를 위한 전초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티니안 섬 은 2.6km 활주로 4개가 있는 남양군도 최고의 비행장이었고 실제로 이곳에서 ‘에놀라 게이’와 ‘박스카’가 이룩했습니다.

1944년까지 티니안섬 전체 인구는 약 18,000명이었는데 대부분이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원주민 ‘차모로족’은 다른 섬으로 쫓아버렸으니까요.

그러다 사이판 전투 직후 미군은 이 티니안섬을 공격했는데 7월 24일에 상륙해 일주일 만에 티니안섬을 점령해버렸습니다.

당시 8,000명이 넘는 일본군 대부분이 전사했는데 일본군은 당시 후퇴하며 조선인들에게도 옥쇄를 강요해 목숨을 잃었고, 현재 티니안섬에 세워진 ‘한국의 위령비’ 아래에는 전체 5,000여구의 유골 중 1,000구가 넘는 한국인 유골이 묻혀있습니다.

1975년 대구대학교 설립자 이영식 씨는 티니안섬에 한국인 유골이 밀림 속에 임시 매장된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밀림 속에서 ‘조선인지묘’라고 쓰인 비석을 발견하고는 인근 지역에 흩어진 5,000여구의 유골을 2년 동안 수습해 조국으로 봉환했습니다.

수십년간 남태평양 티니안섬을 떠돌던 한국인 영혼들이 이제 경부고속도로 망향휴게소 맞은편 망향동산에 모셔졌습니다.

어쨌든, 당시 일본군의 옥쇄 명령을 피해 정글로 도망쳤던 생존자 2,500여명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조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습니다. 상당수의 생존자는 안타깝게도 배고픔을 참지 못해 아사하는 비극을 맞이했고 생존자들은 차모로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섬에 정착했습니다.

티니안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이들은 한인회를 결성해서는 미군의 상륙에 감사한다며 자발적으로 미군을 도왔고 미군으로부터 받은 월급을 모아, 현재 돈 천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헌금하기도 했는데 당시 ‘이춘재’라는 이름을 쓰는 이가 쓴 서신에 따르면 “금액은 적지만 티니안에 거주하는 2,400명의 조선인들의 피땀 어린 정성”이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돌아가지도 못할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무려 4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모아서는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활동하던 독립단체로 송금하는 등 조국의 광복에도 힘썼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약속에 속아 남양군도까지 끌려갔던 조선인들은 전쟁 후 그토록 바라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로 남태평양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아 뿌리를 내린 강제 징용자들의 후손이 현재 티니안섬에서 ‘킹’씨, ‘싱’씨, ‘치오’씨로 살아오고 있는 겁니다.

사이판 해저 위령비 수중 청소

티니안섬의 전체 인구가 3,000명 가량인데 이들 중 절반가량이 완전한 한국인의 피를 가진 차모로족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은 티니안섬에 세워진 한국인 위령비에 매년 제를 지내오고 있습니다.


머나먼 곳에서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자부심으로 한국인 선조들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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