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3월 1일 기준 IMF의 국제금융 통계 공식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보유한 금 보유량은 104.4톤으로 세계 34위 수준입니다.
리비아, 태국, 필리핀, 카자흐스탄 등이 한국보다 더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면 조금 충격적인데요. 심지어 한국 광물자원공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연간 금 생산량은 고작 335.3kg으로 그나마도 사금을 뺀 순금으로만 보면 329.5kg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광산은 채산성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데다 투자금 역시 빈약한 상황이어서 광산이라 불리기도 힘든 상황인데요.
그런데 금 부족국가처럼 보이는 대한민국이 한때는 ‘세계 3대 금광’으로 불리기도 했었고, 한국에서도 미국의 골드러쉬 못지않은 금 캐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귀한 것을 발견했을 때 노다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요. 이 단어는 금광에서 유래했습니다.
1800년대 말 선교사로 조선에 온 ‘알렌’은 고종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워낙 언변과 사교술의 능했던 그는 고종을 꼬드겨 운산 광산 채굴권을 얻어냈습니다.

이후 알렌으로부터 광산 채굴권을 넘겨받은 미국인 사업가들은 조선인들을 고용해 광산에서 금을 캐기 시작했는데 금맥이 발견되면 그들이 제일 먼저 한 말은 ‘노터치’였습니다.
영어를 알지 못했던 조선인들은 “양놈들은 금을 노다지라고 부르는구나”라고 잘못 이해해 ‘노다지’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됐는데요.

이후로도 우연히 금이나 은과 같이 귀한 것을 보면 노다지라 부르게 됐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서양인들에 의해 경제적인 수탈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들의 일만 묵묵하게 해내던 조선 광부들의 슬픈 이야기가 노다지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종이 알렌에게 넘긴 운산 광산 채굴권은 25만원에 불과했는데 당시 운산 광산의 연간 생산량이 4,950만원 현재 시세로 약 4조원에 달합니다.
괜히 동아시아 최대 금광이라고 불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금광을 더 철저하게 파헤친 것은 조선총독부였습니다.
1932년 11월 29일 조선일보에 실린 ‘시대상-황금광시대’라는 만문만화는 “모든 광 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황금광 시대가 왔다. 너도나도 금광 금광 하며.. 강화도는 사십간만 남겨놓고 모두가 금 땅이라 하고 조선에는 어느 곳이나 금이 안 나는 곳이 없다 하니 금 땅 위에서 사는 우리는 왜 이다지 구차한지”라며 당시의 사태를 풍자했습니다.

신문이 풍자한 것처럼 1930년대 조선은 가히 금강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넘쳐나던 ‘골드러쉬’ 시대였습니다.
너도나도 금맥을 찾겠다며 산으로 강으로 들로 떠났는데요. 험한 산을 해치고 다녀야 하는 궂은일이니 남자들만 금광에 뛰어들었을 것이라 생각은 오산입니다.
당시 간호사, 기생 등 여성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횡성에서 발견된 금광 하나로 현재가치로 수백억을 벌어들였던 여성은 지금으로 치면 114 안내원이었습니다.

이렇게 5,500여개의 갱도가 파헤쳐지는 금 열풍이 불었던 것은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금광 업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생산된 금을 고가에 매수하는 ‘상금 장려 정책’을 편 탓입니다.
조선 땅에서 채굴한 금은 당연히 일본 정부에 돌아갔기 때문에 일본은 덕분에 세계 3대 금광국으로 올라섰습니다.
당시 일본이 기를 쓰고 조선의 황금을 채굴한 것은 당시 유일한 국제통화였던 금을 확보해 군비 확충을 꾀한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기획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후 일제가 떠나면서 대부분의 금광은 폐강으로 변했는데요. 당시 한국의 기술력으로는 금광을 개발할 수도 이를 채굴할 만한 여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부터 금광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가장 유명했던 광산은 충남 청양의 ‘구봉 광산’입니다. 이 광산은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금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8년 처음 발견 이후 약 60년간 20톤의 순금이 구봉 광산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전성기로 불리는 1961년부터는 매달 100kg 이상의 금이 쏟아졌는데요. 현재 시세로 본다면 매달 약 75억원이 이 광산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3년 연속으로 말입니다.
또한 금광이라는 특성상 도난 등의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사라지는 금이 약 30%에 이르렀다고 하니 구봉 광산에서 채굴된 금의 양은 전성기에 한 달 100억원을 호가했던 것입니다.
당시 구봉 광산의 비견될 만한 금광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정설인데요. 충남 청양의 구봉 광산에 필적할 만한 광산이 충북 음성에도 하나 있는데 바로 무극광산입니다.

무극 광산은 1956년부터 약 40여년간 15톤의 금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4년 동안 매달 100kg 이상의 순금을 생산해냈습니다.
음성군에 따르면 1995년 당시 전국의 금 생산량의 80% 이상이 무극광산에서 생산된 것이라 하니 가히 기록에 남을 만한 금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광산 역시 1990년대 중반 채산성이 악화하면서 1997년 폐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때는 세계 3대 금광이라 불리든 금광을 보유했든 조선이지만 개화기 서양인들에 의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철저히 파헤쳐진 후 한반도에 남은 금광은 거의 자취를 감췄습니다.

한국광업협회에 따르면 현재 금을 생산 중인 광산중 경제성이 있는 금광은 대우조선해양 SMC가 소유한 전남 해남의 은산광산이 거의 유일합니다.
2015년부터 채굴이 이뤄져 2015년 242kg 시작으로 매년 채굴량이 낮아지면 2019년 71kg이 채굴됐습니다. 이 역시 채산성이 지속해서 낮아지고 있어 곧 문을 닫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있는 채산성 있는 금광은 그나마 가사도 광산 정도이기 때문에 이제 생각을 바꿔 폐자원에서 광맥을 찾는 도시광산 사업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 중 사용하고 버린 가전제품에 사용한 금을 다시 회수하는 것인데요. 한국 지질자원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금광석 1톤에서 얻을 수 있는 금의 양이 3g인데 폐휴대전화 1톤에서는 무려 400g의 금을 회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웬만한 고품위 광산이 아닐 바에야 차라리 폐 휴대전화에서 회수하는 금의 양의 훨씬 채산성이 높다는 것인데요.

도시에 버려진 폐휴대전화를 확보하고 금을 회수하는 기술력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노다지를 캐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부족한 자원을 대체하고자 기술을 발전시킨 국가입니다. 전방위적으로 닥쳐오는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 한국이 도시광산 분야에서 가장 선두가 되어 위기에 현명하게 대응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