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태국전을 끝으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은 박항서 감독은 고별 기자회견에서 “베트남 축구도 한 단계 성장해야 하고 나 또한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서 “이별은 가슴 아프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따르는 게 세상에 이치”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가장 궁금했던 향후 거취와 관련해서는 “한국 또는 베트남에서 감독으로 활동할 계획은 없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행정 쪽 일에도 관심이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어 “지난 5년 동안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서 정상권으로 자리를 잡았다.
피파 랭킹을 100위권 이내로 올려놓겠다는 약속도 지켰다. 베트남이 월드컵 본선행의 꿈을 꿀 수 있게 됐지만, 그건 후임 감독과 함께 할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두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나 자신을 성공한 지도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베트남에서 ‘한국 사람 박항서는 늘 열심히 했던 지도자’ 정도로 기억될 수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 덧붙인 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박항서 감독의 역사적인 5년. 무수한 역사를 새로 써 내려 갔는데요.
그중 백미는 AFF 챔피언십 우승과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이었습니다.

매번 4강 문턱을 넘는 데 어려움을 느끼던 베트남은 2018년 AFF 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들었고, 월드컵 최종예선은 베트남이 최초로 경험하는 무대이자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비록 본선 진출은 실패했으나 베트남도 월드컵이라는 무대에 한발 다가설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입니다.
피파 랭킹이 박항서 감독 부임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보여주는 지표인데요. 베트남은 2016년 최고 순위가 120위에 불과했지만, 박항서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부터 100위권 이내로 들어서더니 2019년부터는 꾸준히 90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항서 감독이 더욱 대단한 것은 그의 성공이 동남아 축구 판도를 바꿨다는 것이었습니다.
최대 라이벌인 태국 대표팀의 마담 팡 단장도 그에 대해 ‘동남아 축구를 바꾼 지도자’라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박항서 감독 이후 동남아에선 한국 지도자 열풍이 불었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차례로 신태용, 김판곤 감독을 불러 안치기도 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성공 가도를 달려온 박항서 감독은 “팬들에게 행복한 축구 감독으로 기억에 남고 싶다”는 말과 함께 다음 감독에게 바통을 넘겼습니다.
박항서 매직으로 축구 역사를 다시 쓴 베트남은 이제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상과제는 월드컵 본선 진출이며, 그간 단 한 번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습니다.
박항서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은 현재의 베트남은 다음 월드컵부터 더 많은 팀이 본선 무대를 밟을 수 있음에 따라 2026년 월드컵까지 진출하기를 바라고 있는데요.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를 완전히 개혁함에 따라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자신감이 엇나간 방향으로 나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박항서 후임으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하는 필립 트루시에 감독에 대해 베트남 기자가 어이없는 질문을 던진 것인데요.
베트남의 새 감독인 트루시에 감독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 대표팀을 지휘했고, 이후 카타르 대표팀, 마르세유, 모로코 대표팀 등 클럽과 대표팀을 두루 거쳤습니다.

트루시에 감독의 첫 임무는 카타르에서 개최될 2023년 아시안컵에서 베트남이 좋은 성적을 꺼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베트남 기자가 트루시에 감독에 대해 어이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박항서 감독의 후임으로 와서 부담이 클 것이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은 그 몇 년간 결승에서 태국을 만날 때마다 패배를 거듭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의 낡은 전술을 어떻게 개혁시킬 것인지 궁금하다”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하지만 박항서 후임 감독으로 부임하는 트루시에게 이런 질문을 날린 것은 실수였습니다.
트루시에는 2019년 9월 베트남 U18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됨에 따라 박항서 감독과 많은 교류를 해왔고, 박항서 감독이 감독으로서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트루시에는 박항서 감독이 스즈키컵 우승 기념행사에서 받은 격려금 10만 달러를 베트남 축구 발전과 불우이웃을 위해서 써달라며 그 자리에서 전액을 기부하는 등의 인간적인 면모를 꾸준히 지켜봐 왔습니다.
특히 2020 스즈키컵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하자 베트남 언론들이 박항서 감독을 맹비난했을 때 박항서 감독이 보여준 모습에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박항서 감독은 “나에 대한 찬사가 언제라도 비난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안다. 주변에서는 나를 베트남에서는 국가적 영웅, 한국에서는 최고의 민간외교관이라고 부르지만 그저 축구 하나밖에 모르는 평범한 축구 지도자일 뿐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터뷰를 항상 겸손하게 하는 박항서 감독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스즈키컵 결승을 앞두고 우승에 대한 베트남의 열망이 최고조로 달아올라 있을 때 박항서 감독이 “저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이고 다음에 올 더 훌륭한 세계적인 감독을 위해 선수단을 단련시켜 놓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말한 것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트루시에 감독은 자연히 박항서 감독을 존경하게 되었고, 베트남 성인 대표팀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태국전을 앞두고는 일본 축구에 대한 이해가 밝다는 점을 활용해 박항서 감독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트루시에 감독은 해당 기자의 질문에 정색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는 기자를 향해 일침을 알렸습니다.
“박항서 감독의 전술이 낡은 것이었다면 그동안의 성과는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늘 생각했던 것이지만 베트남은 객관화가 필요하다.

언제부터 베트남이 태국을 상대로 우승하는 것이 당연한 국가였나? 동남아 축구 역사 속에서 태국은 오랜 시간 동안 강자로 군림했지만 베트남은 아니었다.
베트남이 태국 수준으로 간신히 따라오게 된 것도 박항서 감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베트남 국민들이 박항서 감독과의 이별을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고 그의 업적을 향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런 질문은 박항서 감독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모욕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트루시에 감독의 일침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는데요. 뼈를 때리는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때 베트남은 16강에 진출시킨 박항서 감독이 직접 발 마사지 기계를 들고 한 베트남 선수의 발을 정성스레 문지르고 있는 장면을 베트남 대표팀 수비수가 인스타그램에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 현지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 했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스킨십뿐이었다”라고 밝혔는데요. 이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간 박항서 감독. 앞으로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하며 앞날을 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