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조 가치?? 수많은 보물이 있는 전설의 진시황릉..중국이 아직 발굴하지 않는 비밀??

1974년 3월 중국 서안의 농부 양신만은 우물을 만들기 위해 구덩이를 파던 중 화들짝 놀라는데요. 땅속에서 사람과 매우 흡사한 토용들이 잔뜩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심상치 않음을 느껴 이를 관청에 보고했고, 중국 정부는 당대 고고학 사상 최대 규모의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토용은 곧 ‘병마용갱’이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한마디로 병사와 말의 인형을 묻은 구덩이라는 뜻입니다.

병마용갱에서 발견한 병사 토용은 180~195cm 정도의 키에 늠름한 체격의 모습이었다는데요. 놀라운 점은 병사들의 얼굴과 표정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귀의 모양도 병사마다 각각 달라 실제 사람을 그대로 재현한 것 아닐까라고 생각들 정도였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추후 연구 결과로 실제 8,000명의 병사를 모델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발굴 당시 연구팀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병마용갱이 어느 시대 어느 유적인지 알 수 없었는데요. 진시황릉의 유적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병마용갱이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km나 떨어져 있던 탓에 확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병마용갱에서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진 무기를 찾으면서 병마용갱이 진시황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발굴팀은 추가 발굴을 진행하면서, 총 3개의 병마용갱에서 병사 8천여구, 말 500여필, 전차 130대 등 거대한 규모의 모형들을 발견했다고 하는데요. 이 엄청난 발견으로 병마용갱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고고학 유적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의 부속된 일부 구역에 불과했고 전설 속 진시황의 무덤은 여전히 발굴되지 않았는데요.

“무덤이 너무 거대해 훼손 없이 발굴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발굴 기술이 발달할 때까지 작업을 멈추겠다”는 중국 정부 측의 발표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병마용갱 발굴 당시, 채색되어있던 병마 토용이 발굴 후 산화되면서 검게 퇴색됐고, 수습 과정에서 머리가 부서진 병마용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진시황릉을 섣불리 발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요. 사실 발굴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수은’인데요.

“자동으로 발사되는 화살을 만들어 무덤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되도록 했다”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쉬지 않고 흐르게 했다”

진시황이 불멸의 삶을 꿈꾸며 수은을 몸에 바르거나 먹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얘기인데요. 수은에 대한 그의 욕망은 죽어서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에는 수은으로 만든 강과 바다가 흘렀다는데요. 그뿐만 아니라 진귀한 보물들을 가득 넣어두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이 진시황릉을 실제로 보았을 가능성이 작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수은 바다가 허구적 표현이다’라고 추측했는데요. 그런데 1982년 충격적인 연구조사 결과가 발표됩니다.

바로 황릉 주변 흙의 수은 함유량이 인근 지역의 흙보다 높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심지어 지하 궁전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위치의 수은 함유량 수치는 인근 지역보다 20배 가까이 높은 수치가 측정되었다고 밝혔는데요.

수은은 휘발성이 강한 물질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2,000년도 더 지난 고대 무덤에서 이 정도 수치가 측정된다는 것은 실제로 진시황릉 안에 거대한 수은 바다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의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런 내용에도 일부 학자들은 당시 기술력과 생산력으로 수은 바다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2016년 놀라운 연구 결과가 또 한 번 발표되었습니다. 진시황릉 발굴단이 황릉 바닥의 배수 시설 지도가 존재한다고 밝힌 것인데요. 덧붙여 진시황릉에서 약 100km 떨어진 산시성 쉰 양에서 수은을 대거 운반해왔을 것이고 추정된다는 내용도 발표했습니다.

일단은 연구 결과로 사기에 남은 기록이 실제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커지자 진시황릉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도 중국 정부는 현재까지 진시황릉의 발굴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는데요.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진시황릉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진시황릉이 이미 도굴됐다’는 의혹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고 4년 만에 멸망합니다. 그리고 항우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의 점령해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고, 진나라 왕들의 무덤을 도굴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때, 진시황릉까지도 도굴했다는 기록이 중국 내 고문헌 수경 주에 남아 있는 것인데요.
“30만 명을 동원해 진시황릉을 파헤친 뒤 발굴한 보물을 30일간 실어 날라도 끝이 나지 않았다”

실제로 병마용갱에서 방화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항우가 병마용갱을 훼손했을 것이다’라는 추론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목동이 잃어버린 양의 찾으러 한 동굴에 들어갔다가 진시황의 시신을 안장 한 관을 불태웠다’라는 기록도 발견되면서 진시황릉 도굴 가설이 더욱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진시황릉의 높이가 기록보다 낮은 것이, ‘도굴로 인해 지형이 파괴되어 내려앉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여기에 덧붙여 ‘중국 정부는 진시황릉이 도굴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를 숨기기 위해 발굴을 진행하지 않는 것’이란 음모론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내 학자들은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오히려 항우의 도굴 기록으로 인해 진시황릉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 것인데요. 이미 항우가 도굴을 끝냈다는 소문 덕에 도굴꾼들이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치 작은 산과 비슷하다고 할 정도의 진시황릉의 규모를 봤을 때, 어쩌면 도굴이 건설보다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또 사기에 따르면 지하수가 세 번 돌 정도로 깊게 파여 있는 곳에 진시황이 묻혀있다는데, 이곳을 당시 기술로는 파내기 어려웠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 궁전에는 ‘수은 바다’라고 할 정도로 많은 양의 수은이 흐르고 있을 텐데, 휘발성이 매우 강한 독성물질인 수은의 주변에 사람이 직접 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 때문에 중국 내 학자들은 이런 내용을 근거로 도굴 가능성이 적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2,000여 년이 지나도록 베일에 휩싸인 진시황릉의 실체. 거대한 규모와 웅장한 위용에 진시황릉의 발굴은 여전히 초미의 관심사인데요.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그 위용에 감탄해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진시황릉의 발견으로 인해 8대 불가사의가 됐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유네스코에 등재되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여기에는 아름답지 않은 비밀도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릉이 완공된 후, 무덤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70만 명의 노예들, 장인과 후궁까지도 모두 진시황릉에 가둬버렸다는데요.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한 사람의 무덤을 위해 수십만 명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진시황릉을 발굴하면 보물보다 유골이 더 많을 것을 염려해 발굴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이자 불면을 꿈꿨던 진시황. 천하를 축소해 두었다는 그의 무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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