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사건!! 이분들 아니었으면 일본에 영토 빼앗길 뻔.. ‘일본 침공’ 막은 민간인들

민간 의병들이 외로이 일본 군함들과 항공기의 독도 침공을 물리친 1954년 11월 21일 ‘독도 대첩’에 대해서는 그 실체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는데요.

옛 어른들은 언제 나라가 위태로울 때 “관군의 나라를 지킨 적이 있었나 의병이 지켰지”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거짓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례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일본이 군침을 내는 독도의 경우도 의병이 지켜냈으니 말입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으나 지금까지 영토 곳곳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던 때 일본은 함선을 이끌고 호시탐탐 독도를 노렸습니다.

1952년 7월 한 젊은 남성의 자신의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한국전쟁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는 더 이상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해 육군 병원에서 생활하다 명예제대를 한 후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했던 ‘홍순칠’입니다.

울릉도에서 요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가 경찰서를 찾았다 뜻밖의 사태를 목격하는데요. 경찰서 마당 한쪽에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라는 나무 간판이 놓여 있었는데 그 순간 그는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홍순칠 씨

그의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왜놈들이 자꾸 독도를 침범한다”고 귀에 인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는데 그 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경찰서장에게 들어보니 그간 독도로 출어를 떠난 울릉도 어민들이 독도에 일본이 자국 영토 표기를 한 것이 발견돼 대응조치로 ‘한국 울릉군 독도’란 팻말을 꽂았는데 일본의 자꾸 일본 팻말로 바꾸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전쟁도 끝나지 않은 틈을 타 독도를 야금야금 침범하는 일본의 소행에 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이 독도는 우리 생활 터전이니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리고 즉각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젊은이들을 끌어모아 40여 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 수비대’가 창설됩니다. 그리고 1953년 4월 20일 드디어 울릉도를 떠난 의용군 40여 명은 독도에 입도하게 됩니다.

입도 한 달 뒤 일본이 또 침략을 시작합니다. 5월 23일 서도전방 150m 지점에 약 1,000톤급으로 추산되는 하얀색 일본 경비정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를 발견한 대원들은 즉각 전투 태세를 취하고 M1 소총으로 공포탄 세발을 발포합니다.

의용 수비대와 일본이 최초로 대치한 것인데 이에 대한 양측의 해석이 달랐습니다.

주 일본 한국대표부는 “무장한 일본 선박 1척이 독도 주변으로 침입해 2시간 체류하다가 퇴거한 불법적인 행동”으로 정의하고 이에 대해 일본에 강경하게 항의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순시선 즈가루호는 이전 일본 정부가 설치한 국도 표지가 제거되고 대신 암석 계단 정면에 백색으로 한국 문자와 한국 국기를 대표하는 그림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 관측되었다”고 썼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백색으로 쓴 한국 문자’는 의용 수비대가 독도 바위에 새겨둔 글자를 말하는데요.


수비대를 조직한 홍순칠 대장은 “그냥 우리 땅이라고만 우길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바꿔치기할 수 없는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독도의 큰 바위 하나에 ‘한국령’을 새기기로 결심합니다.

독도의 동도에 위치한 독도 경비대 건물 옆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이 글자는 홍순칠 대장이 이북 출신 서예가 ‘한진호’에게 부탁해서 만들었는데 대원들이 며칠에 걸쳐 바위를 정으로 쪼개고 금광석 숯돌로 갈아 놓으면 그가 와서 손질한 후 초안을 잡고 하나씩 새겨 넣었습니다.

이는 누가 지울 수도 뽑아낼 수도 없어 상징적인 문구가 되었는데요. 제1차 침입으로부터 일본 순시선이 이걸 본 것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후로 총 5차례의 추가 침입이 있었는데 모두 1954년에 발생 했습니다.

1954년 5월 28일 새벽 3시경 450톤의 일본 선박 ‘다이센호’가 독도의 정박해 하선하려는 것을 수비대 4명이 즉시 퇴각시켰으며 무기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두 달 뒤 7월 28일 일본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나가라’와 ‘구즈류호’가 독도를 침범하자 6명의 수비대원이 즉시 전투태세를 취하며 퇴각을 요청하자 상륙을 포기하고 그대로 도망쳤습니다.

한 달 뒤 8월 23일 오전 8시 일본해상보안청 소속 경비정 ‘PS9오키호’가 중무장한 채 300m 지점까지 도발해오자 기관총 600발을 발사했고 후미 쪽에 몇 발을 맞은 경비정은 곧장 도망쳤습니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전투가 가능한 경비정을 투입시켰으며 수비대는 기관총을 사용해 이를 저지했는데요. 그동안 퇴각요청이나 말로 타이르는 것이 가능했으나 이제 조금씩 무기가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0월 2일 일본은 순시선 ‘오키’기와 ‘나가라호’를 독도로 보냈는데 이때 수비대는 나무로 만든 가짜 대포인 ‘목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용한 목대포

당시 수비대는 실탄없이 적을 위협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가짜 대포를 생각해냈고 포구 직경 20cm, 포신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대포를 만들어 포진지에 설치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전처럼 독도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배회하다 돌아갔는데 목대포의 위력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월간지 킹은 “일본 경비정이 독도 근해에서 섬에 주둔 중인 일단의 무장 괴한으로부터 포격을 당했다”고 썼습니다. 가짜 대포였으나 일본의 눈에는 거대한 포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1일. 일본은 아침 일찍 순시선 3척을 독도로 출정시켰는데 수비대가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3척의 순시선이 독도를 포위하며 달려오고 있었는데 비상사태를 직감한 수비대는 즉각 전투 태세를 갖췄습니다. 그리고 500m쯤 접근해오자 일제히 일본 선박을 향해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여기에 박격포 1발이 PS 9함에 명중하며 공격을 받은 선박은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하며 구조 요청을 했고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며 동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즉각 항의 각서를 보냈고 주일 한국대표부 역시 “한국의 관리들은 어떤 위협이나 침입으로부터 독도를 보호해야 할 자기들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경고사격이었을 뿐”이라고 맞섰습니다.

당시 일본 NHK 방송은 이를 긴급 보도로 다루면서 “다케시마에서 한국경비대의 발포로 해안보안청 소속 병사 16명이 사상당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독도를 빼앗아 자신들의 땅으로 귀속시키려던 일본은 독도의용수비대를 맞아 처절히 당한 후 발 한번 딛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독도 대첩’ 이후로 일본이 다시는 독도를 불법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한산도 대첩은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전 세계 해전사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며 매년 통영에서는 화려한 축제가 열립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민간 의병들이 외로이 일본 군함들과 항공기의 독도 침공을 물리친 1954년 11월 21일 ‘독도 대첩’에 대해서는 그 실체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는데요.

사실 독도의용수비대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가볍지 않습니다. 원래 일본은 한국의 전쟁이 끝나기 전에 독도를 침입해 독도를 실효 지배할 계획으로 부단히 독도를 침범했었습니다.

그러나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주둔하며 자신들을 막고 강하게 반발하자 ‘실효적 지배 전략’을 포기하고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로 방향을 튼 것인데요.

즉, 독도의용수비대가 없었다면 우리가 독도를 돌려달라고 떼를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는 10월 25일 ‘독도의 날’과는 별개로 11월 21일을 ‘독도 대첩일’로 지정해 대전 현충원에서 추모식을 열고 희생된 대원들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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