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그는 대한민국 그 자체입니다..세상에서 가장 오래 걸린 금메달 세레모니

정말 치욕과 절망만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올림픽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맺혔지만 방울져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소리 내 우는 것조차 그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 어느 가난한 집안에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납니다. 그의 부모님은 조그만 잡화점을 하셨는데 여섯 식구 모두 넉넉하게 먹이긴 힘들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을 견디며 맹물로 배고픔을 속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마땅한 놀잇거리도 없었습니다. 그저 달리기만이 그 어떤 비용도 들지 않는 훌륭한 운동이자 놀이였습니다.

2km나 되는 등굣길을 매일같이 뛰어갔습니다. 배는 고팠지만 달리는 일은 즐거웠다는데요. 5학년이 되던 해 여전히 달리기를 좋아하던 그 소년은 육상선수 출신 담임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약죽보통학교 이일성 담임선생님은 “녀석 제법 뛰겠는데? 아주 엉터리는 아니야”라며 그렇게 소년은 처음으로 달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곧 나가는 대회마다 1등을 차지합니다.

공부만이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희망이라 믿었던 그의 어머니마저 “그렇게 달리기가 좋으면 하려무나, 기왕 나서 쓰면 그 어떤 고통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라며 그제야 자식의 성공을 빌어 줬는데요.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소년에게도 녹녹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느 학교로부터 입학 권유를 받았으나 학비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 16살, 돈이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하면서 시간을 쪼개 달리기 연습했습니다.

만 20살, 겨우 나이를 속여 육상 명문 양정고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참가한 첫 일본 마라톤대회에서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는데요. 중장거리에만 익숙했던 청년에게 마라톤은 체력적으로 무리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지독한 가난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풀코스 마라톤을 시작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연습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저 무작정 달리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월등해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더 간절해졌습니다. 하늘과 들판을 빼앗겼을지언정 긍지와 정신만큼은 빼앗길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결코 시비 걸 수 없는 완전한 승리를 계획합니다. 계획은 간단했는데요. “절대로 지지 않을 것!”

이후 그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을 거머쥐며, 조선이 들썩였습니다. 연습이라곤 그저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는게 전부인 그는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때쯤 일본 육상계의 질투가 시작됩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조선인에게 1위를 내준 사실은 그들에겐 치욕이었는데요. 코앞으로 다가온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 전, 일본 육상계는 한 가지 꾀를 냅니다.

과거 그가 패배한 적이 있던 그 코스를 굳이 선택한 것인데요. 하지만 그는 그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비공식 세계신기록까지 수립해버립니다.

이어진 2차 예선 전, 동료 마라토너 남승룡과 그가 나란히 1, 2위로 들어왔는데요. 도저히 조선인을 떨어트릴 구실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치졸하게 베를린 현지에서 다시 30km 예선전을 치루기로 합니다. 그는 비좁은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서 2주 만에 베를린에 도착합니다. 육체적으로 지쳐있는 상태에서 그는 올림픽을 며칠 앞두고 다시 선발전을 치릅니다.

“일본 선수가 정해진 코스에서 이탈하더니, 지름길(반칙)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제 코스 30km를 오롯이 다 뛰고도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제는 반칙으로도 더 이상 조선의 두 젊은이들을 이길 수도 또 떨어뜨릴 명분도 없었는데요. 그리고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육상과 올림픽의 꽃 마라톤이 시작됩니다.

27개국 56명의 선수가 스타트 라인에 들어섰는데요. 수많은 관중에 압도 당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한차례 30km 마라톤을 뛰고 온 조국과 이름을 빼앗긴 두 젊은이들은 일장기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생각했습니다. “절대로 패배하지 않겠다고….”

42.195km를 가장 빨리 달려야 하는 종목이 시작됐는데요. 누구는 이 스포츠를 ‘생지옥’이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모두의 관심사는 지난 올림픽 우승자인 후안 자발라의 2연패였습니다. 그런 그가 보기 좋게 가장 앞으로 치고 나갔는데 그 모습은 보고 덜컥 겁이 났다고 합니다.

선두 그룹에서 뒤처지며 불안감이 엄습해 왔을 때 영국 어니스트 하퍼 선수가 조급한 그에게 다가와 천천히 천천히 하라고 손짓을 했다고 합니다.

식민지 선수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경쟁을 뛰어넘은 영국인의 스포츠맨십이었는지.. 오버 페이스를 할 뻔한 동양인 선수를 걱정해 줬습니다.

정말로 그때부터 선두 그룹의 선수들이 한명씩 코스를 이탈했는데요. 30km 지점쯤 됐을 때 선두에 있던 유력 우승 후보 자발라 마저 30도가 넘는 기온에 휘청였는데요. 그날은 10년 만에 무더위 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르막과 내리막, 아스팔트와 비포장도로를 연속으로 마주하며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달리고 또 달렸으며,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또다시 달려가야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뛰는지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이 스포츠 아래 기권하는 선수들이 쏟아졌습니다.

메마른 입안엔 온통 뜨거운 공기뿐이고 다리의 감각은 이미 재 기능을 상실했으며, 오른발은 까지고 짓이겨져 헝겊을 덧 댄 초라한 신발에서는 피가 새 나왔으며, 두통에 사물이 흔들리고 길이 울렁이는 일사병 증상까지 겹쳤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쯤 왔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는 통증을 잊기 위해 떠올렸습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친구와 스승 그리고 동포들을요.

그는 마침내 경기장에 들어섭니다. 그 앞에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42km를 뛰어온 선수, 고작 일주일 전에 30km를 달렸던 선수는 다시 죽을힘을 다해 속력을 냈습니다.

마지막 결승선 앞에서 단거리 선수처럼 내달립니다. 어느 미국의 육상코치가 잰 그의 마지막 100 m 기록은 ‘12초대’였습니다.

“올림픽 우승은 그 모든 것을 쏟아낸 일생의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복받치는 감격 아래 그를 마주한 건 비극이었습니다.
그는 몰랐습니다. 우승자를 위해 ‘기미가요’가 울릴 줄은, 우승국과의 ‘국기’가 올라간다는 것을요.

그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오직 1위에게만 수여된 월계수 묘목으로 일장기를 숨깁니다. 3위를 차지한 남승룡은 바지춤을 올려 보지만, 가슴에 붙은 치욕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최선의 ‘저항’이었습니다. 눈물이 났지만 일본은 그 눈물마저 일본에 바친 기쁨의 눈물이라고 보도합니다. 그때는 조선인의 눈물조차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신문사는 폐간을 무릅쓰고 그의 가슴팍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냈습니다. 역시 가만히있을 일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순사들은 그를 포승줄로 묶어버렸는데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이후 그는 후배들 양성에 힘을 다합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34년 하고도 361일이 걸려 우리는 빼앗긴 산과 들 그리고 내 부모와 내 자식의 이름을 되찾아 옵니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성화 주자로 초대됩니다.

고무신을 신고 만주 벌판을 뛰던 소년은 어느덧 여든이 가까운 노인이 되었는데요.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품위나 체면 따위 없이 세상 어느 어린이보다 더 해맑게 뛰었습니다.

그것은 52년 전 차마 할 수 없었던 세상에서 가장 오래 걸린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세레모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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