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준비는 모두 끝났다” 미국 전문가가 더 나서서 한국 수준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지난 1월 30일 미국 워싱턴 싱크탱크인 스팀슨 센터에서는 전 세계 핵 전문가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단연 주제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따른 한국의 핵무장론이었습니다.

이에 세계 최고 핵 전문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한국은 핵무기는 즉각 만들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요.

그는 미국 최대 핵 연구시설인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을 지낸 인물로 북한의 초청을 받아 영변 우라늄농축시설과 원심분리기 시설 등을 직접 둘러본 몇 안 되는 핵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국이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핵실험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한국의 어느 지역이 자기 땅 지하에서 핵실험을 허락할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는데요.

즉 한국은 이미 핵무기 개발을 위한 충분한 기술력에 과학기술까지 가졌으나 가장 큰 문제는 핵무기 생산 전 진행될 핵실험 장소가 여의치 않다는 것입니다.

과연 한국은 실제로 핵무기 개발할 능력이 있는 것 인지, 외국 전문가의 주장일 뿐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역대 한국 대통령 중 핵무기의 가장 큰 관심과 열정을 쏟은 인물은 아마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입니다.

1970년대 그는 주도적으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설득 속에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최소 1978년까지 자체적인 핵 개발 의지를 보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사실은 미국 안보전문연구기관인 노틸러스연구소가 공개한 미 중앙정보국 CIA 기밀 해제 문서에 나타났는데요.

당시 CIA 한국지부 총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는 “한국의 우호적이던 미국이 갑자기 등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가 시도했던 핵 개발 때문”이라고 털어놨습니다.

실제로 2005년 공개된 CIA 보고서 ‘한국: 핵 개발과 전략적 의사결정’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74년 12월 ‘890계획’이라는 암호명으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책임 아래 미사일 팀, 핵탄두 팀, 화학탄두 팀을 구성해 수십 명의 국내외 과학자 및 기술자가 핵무기 연구에 착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미국이 1976년 “핵 개발을 중지하지 않으면 한국과 모든 관계를 중단할 것”이라며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포기했는데요.

그런데 미국의 압박이 두렵기도 했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을 신뢰하게 된 사건도 이때 일어났습니다. 바로 ‘판문점 도끼 사건’인데요.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던 그 해 8월 18일,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미군 병사 6명과 한국군 5명 등 11명의 유엔군 장병의 호위 속에 한국인 노무자 5명이 “북한 쪽 초소에 대한 시야가 가린다”며 유엔군 제3초소 앞에서 가지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북한군 장교와 10명의 북한군이 다가오더니 “나뭇가지를 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군 장교는 “시야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며 이를 무시했는데요.

잠시 후, 트럭을 타고 북한 병사 20명이 몰려오더니 도끼를 빼앗고 곡괭이를 휘두르는 등 일방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이 사건으로 미군 병사 2명이 사망하고 마는데요. 사건은 단 4분 만에 종료되어 미 기동타격대가 도착했을 때 북한군들은 이미 군사분계선 너머로 철수한 뒤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미국은 핵 탑재가 가능한 F-1 전투기 20대를 한반도에 배치시키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출격했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북한 해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무력 시위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을 충분히 압박하지는 못했지만 박 전 대통령을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이에 핵 개발을 포기했던 거지만 그 신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7년 1월 취임한 ‘지미 카터’는 대선공약으로 주한미군 2사단 철수를 내세웠는데, 이에 대한 미 의회의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추진했었습니다.

이에 대해 아직까지 산업화도 완성하지 못했고, 모든 분야에서 취약한 상황에서 북한의 도발까지 걱정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한국 정부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이에 다시금 핵개발 프로그램을 꺼내 들기도 했었습니다.

이 역시 당시 CIA의 기밀문서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2차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이 원했던 것은 ‘지금은 기를 쓰고 반대하지만 결국에는 핵 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스라엘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 1974년 프랑스와 원자력협정을 체결했는데요. 이스라엘 역시 1950년대 프랑스가 도와준 덕분에 핵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이나 소련 등과 같이 핵 보유를 제한하는 것보다 전 세계적으로 핵 보유를 확산시켜야 결국엔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한편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핵 개발이 88% 이상 완료됐다. 1983년에는 핵무기가 완성될 것 같다”고 밝혔었는데요.

충청북도 괴산군의 우라늄 광산에 대한 개발도 진행했었습니다. 이 광산은 유사시 핵무기 제조에 즉시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우라늄-235의 함유량이 적어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얻은 것도 있는데요.

핵 개발에 대한 의중을 표하고 3개 팀으로 나눠 핵 개발을 진행하는 등의 과정에서 1978년 한국이 사거리 180km의 백곰 미사일에 개발해낸 것입니다.

이는 의정부에서 평양까지 직선거리에 해당하는데, 일단 미사일의 존재 자체로 북한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됐는데요.

핵 개발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니 일단 북한까지 핵을 날려 보낼 미사일이 먼저 준비된 것입니다.

실제 핵무기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당시 오원철 경제수석은 “이미 핵연료 재처리 기술도 확보하고 있었고 핵심 부품들도 이미 밀반입에 성공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다만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시해된 이후로 한국은 거의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핵기술을 그대로 폐기했는데, 그 역할에 전두환이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그는 미국의 환심을 사고 그의 지위를 인정받을 목표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폐기해버리면서 결국 88%에 달했던 핵 개발은 12%를 남겨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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