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을 살린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를 울린 기적’ 단 한 사람의 외국인이 한국인 1만 4500명의 목숨을 구한 기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함으로써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이 참전하며 국제전으로 양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대로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울을 함락당하고 이후,계속 후퇴를 거듭하여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평양 입성을 하며 북한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를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중국이 인해전술로 무수한 중공군들을 동원시켜 참전하면서 전쟁의 흐름은 다시 한번 바뀌게 되었는데요.

1950년 11월 말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미 8군 중공군에게 괴멸에 가까운 대패를 했고, 끝도 없이 들이닥치는 중공군에 미 1군단 전체가 중공군에 포위당해 섬멸될 위기에까지 놓이게 됩니다.

이에 유엔군 측에서는 급히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수많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온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기에 암담한 미래만이 남아있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대로 국군과 미군이 몰살당하며 이 지역을 내주게 된다면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생존 역시 보장받을 수 없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처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단 한 사람의 용기 있는 결단이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며 무수한 생명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역사에 다시없을 위대한 결단으로 손꼽히는 ‘흥남 철수 작전’의 주역 중 한 사람은 우리나라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달의 전쟁 영웅’으로 꼽히기도 한 레너드 라루 선장인데요.

레너드 라루 선장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우리 국군의 상황은 거의 최악에 가까웠습니다.

수를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중공군의 끝없는 공세에 더해 함경남도 특유의 살인적인 한파가 불어 닥쳐 더는 전투 태세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점점 아군의 기세는 꺾여 나기 시작했고, 결국 중공군의 공세를 겨우겨우 막아 내던 국군과 유엔군은 몇 차례의 전투에서 끔찍한 참패를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상황이었기 당시 지휘관은 철수와 북진을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중공군과 북한군은 기필코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일념 하에 지치는 기색조차 없이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고 결국 조건과 상황, 환경이 모두 불리한 아군 측은 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랜 고민 끝에 철수를 결정했지만 돌아가는 길 역시 절대 순탄하지 않았던 것인데요.

철수가 결정되었을 당시, 함흥과 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은 이미 중공군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고, 그렇게 12월 9일에 이르러서는 중공군이 원산까지 점령하며 우리의 퇴로가 완전히 끊겨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군의 병력과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은 배로 철수하는 것 이외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해로를 통해 철수 한 것 역시 굉장히 위험부담이 큰일이었는데요.

유엔군 사령부는 해상 철수가 이루어지는 흥남 부두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설정하고 동해에 위치해 있는 미 해군 함포 사격의 도움을 받기로 하며 국군과의 철수를 준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병력들이 철수를 결정했다는 소식은 이미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생명을 부지하고자 사람들이 흥남부두로 몰려 배를 타려는 인파들로 인해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애절한 부탁과 간청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군 지휘부에서는 이 피난민들을 데려가는 것을 꺼렸는데요.

피난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미군의 희생은 계속해서 커질 수밖에 없었고 또한 병력과 장비, 물자를 싣는 것만 하더라도 수송선이 부족한 실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결정적으로 만약 피난민 사이에 북한군과 중공군 스파이가 침투해 수송선 내 파괴 공작을 펼치게 된다면 끔찍한 참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기에 미군 지휘부 측에서는 피난민들을 두고 가겠다며 우리 국군에 통보하기에 다다랐는데요.

하지만 한국군 지휘관들은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면 맹렬히 이에 반발했고 결국 끈질긴 설득 끝에 미군 측에서는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다면 피난민을 태우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렇게 철수작전은 시작되었지만, 당시 피난민은 10만 명에 달했으며 병력과 물자를 우선시해 철수를 진행하다 보니 이대로라면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남 부두에 남아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피난민들 사이에서는 먼저 배에 타겠다며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다툼에 현장이 벌어지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때마침 근처에서 미국의 상선을 이끌던 한 외국인이 등장하게 됩니다.

자신을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라고 밝힌 레너드 라루라는 사람이 자신의 배를 이용해 흥남 에 머물고 있는 피난민들을 철수시키는 것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에 국군은 반색하며 그를 반겼지만, 각종 화물을 싣고 있던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탑승 정원은 고작 60명 수준에 불과했는데요.

하지만 레너드 라루 선장은 한 번 더 대단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훗날에도 이날의 상황을 묘사하며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자기가 갖고 올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

당시의 장면을 생생히 떠올릴 정도로 피난민들을 무척이나 안타깝게 여겼던 그는 자신이 봐야 하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도 싣고 있던 무기와 물자들을 버려가며 그렇게 우리 피난민들을 승선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무려 약 16시간 동안 기존 정원의 233배에 달하는 1만 4천 5백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피난민을 이 배에 탑승시킬 수 있었고, 그렇게 12월 20일이 마침내 흥남을 떠난 배는 23일 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단일 선박으로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는 레너드 라루의 이날의 결심은 1만 4500명이라는 목숨을 살린 것에 더해 그가 구한 사람들의 훗날 후손들까지 생각해본다면 거의 몇 백만 명에 달하는 생명을 구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나라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은인인 것인데요. 이와 같은 그의 선택은 시간이 흐르며 전 세계에도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인류애와 감동을 전해 주었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며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칭송 받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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