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실제 아프리카 추장!! 슈바이처도 미처 하지 못한 걸 해낸 한국인 전 세계 인구 8억명의 생명줄!!기적을 만든 ‘농민의 왕’ 그의 실제 이야기

아프리카의 고질적인 문제인 영양결핍과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는 아주 오랫동안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프리카는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데요.

1970년 아프리카 최빈국 중 하나였던 나이지리아는 드디어 길고 긴 내전을 끝냈습니다. 약 3년간 이어진 ‘비아프라 내전’으로 전 국토는 폐허가 됐고, 전쟁 후 굶어 죽은 사람만 50만명이었습니다.

전 세계 언론은 연일 기근이 창궐했다는 뉴스를 쉴새 없이 내보냈었는데요.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이지리아에서는 국가의 존폐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주식인 ‘카사바’에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심각하게 퍼지면서 카사바 생산량이 급감한 것인데요. 카사바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재배되는 세계 8대 작물 중 하나입니다.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전 세계 10%가 넘는 8억 명이 넘는 인구가 카사바를 주식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박테리아로 카사바 씨가 마른다는 것은 필수적으로 기아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리고 한 한국인이 조용히 나이지리아로 향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예수’, ‘농민의 왕’, ‘한국인 최초 아프리카 추장’으로 불렸던 한상기 박사입니다.

1933년생인 한 박사는 충남 청양에서 나고 자라면서 자연이 농사에 미치는 영향을 몸소 체험하며 성장했습니다. 부모님이 농사짓다 폭우 한 번에, 가뭄 한 번에,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농업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는 자신의 목표가 확고했기 때문에 대전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농과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석사과정에서는 국내 최초로 ‘잡초 학’을 연구했고, 6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식물유전육종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유명한 육종학자였기 때문에 서울대를 포함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으로부터 수많은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그가 선택한 것은 ‘국제 열대 농학연구소’인 IITA입니다.

1971년 당시 나이지리아에는 세계에서 3번째로 IITA가 설립되었는데요. 그는 안정적인 대학교수보다는 힘들고 고된 노동을 택했습니다.

한상기 박사님

1970년 밀을 개량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국의 농학자 ‘노먼 볼로그’ 처럼 그 역시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육종학으로 인류에 기여해보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마침내 나이지리아 라고스에 도착합니다.

당시 연구소장은 나이지리아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카사바를 맡아보라고 업무를 맡겼는데요. 문제는 한 박사가 태어나 단 한 번도 카사바를 본 적 없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막막하다고 손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인류에게 기여하고 싶다는 목표를 내세웠기 때문에 열심히 카사바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약 5년 동안 나이지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재래종 카사바 종자를 최대한 수집한 후 원산지인 브라질로 떠나 가장 우선 카사바 종자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항체를 보유한 한 식물을 찾았는데요. 카사바는 아니지만 카사바처럼 생긴 식물이었습니다.

과거 영국 연구팀이 나이지리아 재래종과 브라질 카사바 야생종을 교배해 만든 바로 그 카사바였는데요. 그리고 그 식물을 브라질에서 가져온 우수 종자와 교배시킨 후 슈퍼 개량종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이러스 박테리아에 강하면서도 수확량도 우수한 카사바가 태어난 겁니다. 사실 카사바의 박테리아 문제는 비단 종자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카사바는 뿌리가 아닌 줄기를 심어 자라게 되는데요. 카사바를 심기위해 줄기를 잘라낼 때 소독되지 않은 도구에서 묻어난 바이러스가 함께 심기면서 바이러스가 문제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바이러스에 강한 카사바 종이 있다며 이러한 위험성이 감소하기 때문에 한 박사는 이러한 종자를 개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하기까지 걸리 시간은 5년. 1976년에서야 완성했는데요. 단지 완성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는 나이지리아 전역을 다니며 곳곳에 카사바 줄기를 꽂았습니다.

그가 다니다 병든 카사바밭을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열심히 땅에 심었고, 시골 장터에 장 보러 나온 여인들에게 이를 공짜로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서 이 슈퍼 카사바가 나이지리아 전역을 배를 불려주기를 바랬습니다.

지난 1993년 ‘세계은행’은 “한 박사가 개발한 ‘슈퍼카사바’는 수확량이 1헥타르당 12톤으로 기존 재래종보다 2배 이상의 생산량을 자랑한다”고 평가했는데요. 그는 이후에도 지속해서 새로운 슈퍼 카사바를 만들어 생산량의 4배까지 증가한 카사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바이러스에 강한 슈퍼 카사바를 개발하면서 나이지리아의 기아 문제는 빠르게 해소되기 시작했고 현재 그 카사바는 아프리카 41개국에 보급되어있습니다. 즉, 아프리카 거의 모든 국가에서 한 박사가 개량한 슈퍼 카사바를 심어 식량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려 5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내병성을 유지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그 외에도 그가 개발한 고구마 품종은 66개국에서, 얌은 21개국에서, 식용 바나나는 8개국에서 재배 중이며 그 목록을 보면 철저하게 주식으로 사용되는 농작물들입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된 나이지리아에서는 1983년 그를 추장으로 추대했는데요. 그들이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나이지리아의 ‘요루바족’의 ‘오요 요바’는 한 박사를 추장으로 추대하고 ‘세리키 아그베’라는 칭호를 주었는데요. 이는 ‘농민의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많은 이방인이 받았던 추장 칭호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실제 추장이 됐습니다. 그가 얼마나 존경받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아프리카에서 추장은 인간뿐 아니라 산천초목을 모두 다스리기 때문에 땅을 사고 팔 때도 추장의 허가가 필요한 ‘아키레 법’을 따라서 실제 추장이 되어 나이지리아인들과 함께했습니다.

한 아프리카인의 비석에 ‘슈바이처 박사, 당신이 아프리카에 와서 노벨상도 탔지만, 우리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한일이 뭐요? 라는 비석이 있는데요.

이에 대해 한 박사님은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일평생을 희생한 것은 높이 살 만한 일이지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도 힘썼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일부러 교육과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국제기구에서 연구비와 지원금을 받아 농학 석, 박사 50여명, 농촌지도자 700여 명을 교육했고, 이들이 다시 농촌 지도자들을 훈련하도록 해 1만 명이 넘는 새로운 지도자가 배출됐습니다.

‘농민의 왕’이라고 불렸던 그가 나이지리아에서만 인정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영국 왕실은 그에게 ‘생물학술원’ 명예 회원으로 추대했고, 세계식량기구(FAO)는 그를 고문으로 영입했습니다. 영국 기네스 과학 공로상까지 받은 그의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실렸는데요.

이렇게 평생을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쓴 그는 미안한 사람이 딱 한명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의 아내 김정자 여사입니다. 2020년 9월 하늘나라로 떠난 그녀는 한 박사에게 가장 큰 힘이 되준 사람입니다.

아프리카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그녀는 평생 해외로 출장을 떠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세계적인 명성과는 달리 아프리카 생활은 가난하고 고단하기 그지없었고 항상 강도의 위협에 떨어야 했으면서도 꿋꿋하게 아프리카 생활을 견뎌냈습니다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를 해결한 한상기 박사님과 같은 인물이야말로 진정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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