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하던 ‘과거’ 1등 일본…한국 기술 수준 운운하며 손 안 잡았던 일본 지금은 후회막급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준비가 안 된 한국은 부산까지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부산에는 연합군의 수많은 군함들이 집결했습니다.
당시 한 소년은 생전 처음 쇠로 만든 배를 본 순간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처럼 이런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1954년 스웨덴 코쿰 조선소에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나라의 한 청년이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조선소 측은 청년의 사연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이동경비와 비행기 티켓을 보내 한국 청년은 조선소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22살이 된 청년 신동식은 스웨덴 조선소에서 낮에는 현장에서 철판을 자르고 용접을 하며 현장 기술과 노하우를 익히고 밤에는 설계도와 이론을 공부하며 4년 동안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26살에 신동식은 영국 로이드선급협회의 아시아 최초의 국제검사관이 되었습니다.
영국 로이드선급협회는 현재에도 미국과 함께 세계 양대 조선협회로서 전 세계 조선업계에 영향을 끼치는 곳입니다.
신동식은 로이드 검사관이 되고 나서 전 세계 많은 기업인, 정치가들과 인맥을 맺게 되는데요.
1965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신동식은 미국 순방을 온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되고 대통령으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신동식은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경제수석비서관이 되고, 그리고 1년 뒤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데요.
존슨 대통령은 당시 한국이 미국의 요청에 의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한국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며 깜짝 선물을 제안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존슨 대교, 존슨 기념탑 등의 아이디어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신동식 비서관만은 과학연구소를 지어 달라고 건의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해서 한국의 과학연구소가 생겼는데요.
현재 대한민국은 그 연구서를 KIST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정부의 정책에 쓴소리를 많이 했던 신동식 비서관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마디를 하는데요.
“임자가 외국에 인맥들이 있으니, 자네가 힘 좀 써주게”
그렇게 신동식 비서관은 틈나는 대로 외국어로 나가 로이드 검사관 시절의 인맥을 동원해서 기술과 자본을 빌려와 국가 인프라와 산업화에 필요한 공장 건설을 주도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를 향해 개발독재자의 하수인이라고 불렀습니다.
1969년 신동식은 자신이 평소에 그리던 마스터플랜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요.
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큰 반대를 불러왔습니다.
“세계 인구는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배로 운송하는 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러면 거대한 배가 필요하게 되는데, 우리가 먼저 세계 최대 조선소를 지으면 세계 최대 조선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즉, 한국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짓자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경제 수준과 기술력으로 조선소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을 넘어 꿈조차 꾸면 안 되는 정도였는데요.
하지만 이 조선소를 현대 정주영 회장이 맡게 됩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당시 세계 최대의 조선소인 울산 조선소를 갖게 되었고, 한국 조선소 건설에 ‘미친 짓’이라며 비관적이던 당시 세계 조선업계 1위였던 일본은 20년 후 한국에게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동식을 미친 사람이라던 해외 평가들은 현재 그를 한국 조선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했던 신동식은 아직도 현역으로 조선업계에 몸을 담고 있는데요.
그는 현재 2~3세대 조선업계 회장들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